중세의 사본에 "달팽이와 기사의 싸움"이 대량으로 그려져 있는 이유?

 13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유럽 사본에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드래곤도 악한도 아닌 달팽이와 싸우는 기사들의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다. 책의 내용이나 글의 취지와는 무관한 경우가 많은 수수께끼의 삽화에 대해, 영국 웨일스의 뱅거 대학에서 중세 문학을 연구하고 있는 매들린 S. 키라키 씨가 고찰.



키라키씨에 의하면, 달팽이와의 싸움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1290년경의 북프랑스에서 제작된 채식 사본이라고 하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자 비슷한 삽화가 플랑드르 지역이나 영국 등 유럽 각지의 사본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


달팽이가 등장하는 삽화는 종종 글의 내용과 무관하며, 많게는 뿔을 날카롭게 뻗은 달팽이에 맞서는 완전무장 기사의 모습을 그린 것. 기사의 무기는 다종다양해서 창, 메이스, 프레일, 오노, 검, 심지어 농기구 포크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달팽이와의 전쟁이 사본에서 인기를 끌면서, 중세 생활의 다양한 장소에서 이 모티브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1310년 프랑스 리옹 대성당 정면 입구에 새겨진 장식에는, 개머리 달팽이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유럽 대륙을 횡단하며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 대 달팽이"의 구도가 나라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키라키 씨는 "이 모티브는 깊은 의미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라고 지적.


그렇다고는 하지만, 달팽이와 기사의 싸움이 중세에서 인기를 끌었던 정확한 이유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진지하고 무미건조한 글에 유머를 더하기 위한 삽화였다고 한다. 즉,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라는....


삽화 중에는, 기사가 검을 떨어뜨리거나 달팽이에게 패배하여 무릎을 꿇는 것도 많으며, 이에 따라 풍자적인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한편, 달팽이는 자신의 집을 운반할 수 있기 때문에, 중세 시대 사람들에게서는 남다른 힘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달팽이와의 싸움에는 정신적 용기나 개인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시련이라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달팽이는 결코 용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진정한 힘과 용기를 표현하기 위해 타도하는 대상으로 선정되었다고도 생각되어진다.


14세기경에 유행했던 달팽이와 기사의 싸움의 모티브는, 15세기 말 사본으로 단기간 부활한 뒤 시대가 흐르면서 사본에서 사라졌는데, 그 자취는 영국에 전해지는 동요 "24명의 재단사가 달팽이를 퇴치하러 갔다"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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